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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당시 부여왕 麻余는 선왕 簡位居의 蘖子로 諸加들의 도움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麻余의 왕권은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부여의 정치적 실권이 大使 位居에 의해 장악되었던 정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大使 位居와 牛加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등 정국의 혼란이 이어지는 한편, 왕 麻余 마저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부여의 중앙에서는 지배층의 분열과 이탈 현상이 심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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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렵 부여 왕권의 위상과 집권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3세기 무렵 부여에서는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형벌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官’으로 표현된 관청과 ‘牢獄’으로 상징되는 형벌기관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또한 殷 正月에 진행된 祭天行事 迎鼓에서는 刑獄을 결단하는 한편, 囚徒를 풀어주는 국가적 사면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부여 왕권이 형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殷 正月에 거행된 迎鼓는 부여의 시조 東明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된 제천행사이다. 이때 부여왕은 天神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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