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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의 沃沮 지배와 토착 지배층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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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의 沃沮 지배와 토착 지배층의 동향
  • The Han Empire’s Domination over Okjeo Area and the Response of Local Elites-Focused on the Case Study of Bujoyegun (夫租?君)-
저자명
李丞鎬
간행물명
동국사학KCI
권/호정보
2014년|57권 (통권57호)|pp.246-289 (44 pages)
발행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한국
파일정보
정기간행물|KOR|
PDF텍스트(1.77MB)
주제분야
교육학
서지반출

국문초록

1958년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동 1호분에서는 銀으로 주조 된 인장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그 印文에는 ?夫租?君?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夫租’는 곧 沃沮를 뜻하며, 이를 통해 이것이 기원 전 1세기 무렵 활동하였던 옥저 지역의 토착 거수 夫租?君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본고는 이 夫租?君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 삼아 기원전 1세기 무렵 漢의 지배 속에서 옥저의 토착 지배층이 어떻게 대응하여 나갔는지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부조예군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로 당시 옥저 지역 은 玄?郡의 관할 하에 놓여있었다. 부조예군은 이러한 현도군의 통치에 협조하면서 토착 지배층으로서 지역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의 퇴축과 동부도위의 설치라는 옥저 지역의 격변기를 맞아 낙랑군으로 거주지를 옮 겨오게 된다. 그러나 부조예군의 무덤인 정백동 1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부장품들을 통해 볼 때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낙랑군에서 매우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덤에서 많은 양의 무기류 가 출토되었던 점을 통해 볼 때 생전의 정치적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부조예군은 무슨 연유로 낙랑 지역에 옮겨오게 된 것이며, 또 그가 새로 옮겨온 낙랑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높은 사회적 위치를 향 유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75년 무렵 夷貊의 침입 속에 현도군이 붕괴하자 漢은 당시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樂浪郡에 옥저 지역을 편제시키고 한층 긴밀한 군현 지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서 토착 지배층 중심의 자치력이 작동하던 옥저의 재지 사회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부조예군을 비롯한 유력 토착 지배세력은 오히 려 이와 같은 郡縣 정책에 적극 편승하였다. 무덤에서 발견된 ?夫租?君? 銀印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유물로서 낙랑군이 옥저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 협조한 옥저의 토착 지배층에게 내렸던 賞賜品이었던 것으로 분석 된다. 즉 옥저의 유력 토착 지배층들은 낙랑군 중심의 지배 체제 개편에 협조하면서 낙랑 사회 내에서도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낙랑군의 沃沮 지역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영문초록

In 1958, a silver seal was excavated in Jeongbaekdong Tomb No. 1 in Nangnang District, Pyeongyang. There is four-letter inscription on the seal which reads ‘Bujoyegun (夫租?君)’. Since ‘夫租 (Bujo)’ means ‘沃沮 (Okjeo)’, it is possible to assume that the person buried in the tomb is a local elite of Okjeo from the 1st century B.C., Bujoyegun.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how the local ruling class of Okjeo area coped with the Han Empire’s Domination over the area in the 1st century B.C., by examining relevant materials to Bujoyegun. In the early 1st century B.C., the period of Bujoyegun, Okjeo was under the control of Hyeonto Commandery (玄?郡) of the Han Empire. Bujoyegun seems to have been able to maintain his social status as a local elite in the area by helping the Hyeonto administration. However, at around B.C. 75, he had to move his residence to Nangnang Commandery (樂浪郡) when Okjeo witnessed Hyeonto’s abolition and the installation of Dongbudowi (東部都尉). The vast amount of grave goods, especially numbers of weapons, unearthed from Jeongbaekdong Tomb No. 1 suggests that Bujoyegun could manage his superior social and political status in Nangnang area until he died. The surroundings of Bujoyegun’s migration and his unchanged high social status still need to be elucidated. Due to the invasion of Yemak (夷貊) at around B.C. 75, Hyeonto Commandery was collapsed and, therefore, Han merged Okjeo into more stably managed Nangnang Commandery to strengthen its control over the area. Amid this political shift, the ruling class of Okjeo lost its social foundation. However, some influential local elites such as Bujoyegun actively assisted Han’s domination. The silver seal from his tomb seems to be one of the Han Empire’s awards granted to the cooperative local elites of Okjeo. Bujoyegun and other powerful figures of Okjeo could maintain their social positions by collaborating with the reformation of Han’s domination at the time. From the information gathered above, it is possible to assume that those elites continuously performed an important role in the Nangnang administration.

목차

Ⅰ. 머리말
Ⅱ. 漢의 沃沮 지배 추이
Ⅲ. 玄?郡 시기 沃沮 토착 지배층의 동향
Ⅳ. 夫租?君 樂浪 移居의 배경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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